[한류타임즈 함상범 기자] 배우라는 직업이 가진 특수성 중 하나 경험하지 못한 삶을 마주한다는 데 있다. 작가가 쓴 글에 자신을 이입하며, 새로운 캐릭터를 형성해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 배우의 소임인데, 대체로 일상에서는 쉽게 발생하지 않는 극적인 경험을 한다. 

그런 중에 비슷한 색감의 인물 위주로 연기하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배우 이정은처럼 선과 악, 부르주아와 프로레탈리아, 서민과 엘리트를 오가는 예도 있다. 대체로 연기력이 좋을수록 스펙트럼이 넓다.

통통한 체격에 귀여운 인상을 가진 이정은은 일반적으로 주인공을 맡는 여배우와는 다른 결에 서 있다.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친근한 인상이며, 말투나 이미지도 인간적이다. 따라서 그가 맡는 역할은 현실에 발을 딱 붙이고 있다. 이정은이 맡은 인물은 마치 우리 옆에 있는 듯 사람 냄새가 난다. tvN ‘미스터 선샤인’ 함안댁이나, 영화 ‘기생충’의 문광, ‘자산어보’의 가거댁, tvN ‘갯마을 차차차’의 연옥이 그렇다. 

워낙 연기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갖고 있다 보니, 매우 색다른 캐릭터도 구현해낸 이정은이다. 영화 ‘미성년’의 방파제 아줌마, OCN ‘타인은 지옥이다’의 엄복순, ‘내가 죽던 날’의 순천댁이 그렇다. 인위적인 색감이 짙은 인물조차 보편적인 인간의 향취를 불어넣는다. 

현실적으로도 연극적으로도 차원이 다른 재능을 선보인 이정은이 데뷔 후 약 30년 만에 첫 단독 주연으로 나선다. 영화 제목은 ‘오마주’다. 연출을 맡은 신수원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이 영화에서 이정은은 영화 감독 김지환으로 나온다. ‘미성년’을 보고 살아 움직이는 연기의 충격을 받은 신 감독이 캐스팅을 제안해 영화로 제작됐다.

극 중 지환은 예술영화 방면에서 특출한 능력을 보여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 경력이 있지만, 대중성이 결여돼 내는 작품마다 인기는 끌지 못하는 인물이다. 1000만 관객이 즐비한 영화의 시대에, 100만 관객 동원조차 꿈만 같은 위치에 있는 감독이다. 

일에 매진하며 살다 보니 가족들로부터 핀잔을 듣기 일쑤다. 남편은 외로움에 지쳐가고, 하나뿐인 아들 역시 아빠의 입장을 더 대변한다. 딱히 이뤄놓은 것도 없는데, 가족으로부터도 지지받지 못하는 여성 영화감독이 수십 년 전 시대에 저항하며 영화를 만들었던 홍은원 감독의 삶을 뒤쫓으면서 희망을 얻는다는 이야기다. 

50대에 접어들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 헷갈려하는 김지환을 맡은 이정은이 지난 17일 한류타임즈와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데뷔 후 국내 최고의 연출진이 같이 일하고 싶은 배우 0순위로 선호 받는 그에게 지금이 어쩌면 화양연화일 수 있다.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이정은이 가진 배우로서 생각과 고민을 들어봤다. 

 

영화는 커다란 갈등이 있기보다는 지환의 소소한 일상을 들여다보는 구성이다. 엄마로서 예술 영화를 주로 다루는 영화감독 지환의 삶을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바라본다. 신작이 개봉했지만, 텅텅 빈 극장을 바라보고 시나리오를 쓰는 중에도 ‘되’와 ‘돼’가 헷갈려 진도를 빼지 못한다. 아들은 “엄마 영화는 제목부터 재미없다”고 쏴붙인다. 남편은 생활비를 주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답답한 일상이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힘든 중에도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길 위에 발을 뗀다. 

“대본 읽었을 때 공감을 많이 했었어요. 저도 공연을 준비했었는데, 두 번 정도 말아먹은 적이 있었거든요. 특수한 직업을 떠나서 일하고 있는 엄마와 아내는 많잖아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가족의 지지는 받지 못하고 있지만, 청춘의 꿈은 이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점에서 볼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50살을 넘기다 보니까 고민이 되기 시작하더라고요”

지환은 우연한 계기로 국내 첫 여성 영화감독인 홍은원 감독의 ‘여판사’를 복원하는 업무를 맡게 된다. 남북 전쟁 후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 여성 인권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은 ‘야만의 시대’로도 일컬어지는 때에 영화감독의 꿈을 꾸는 홍 감독의 삶을 찾는 여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홍 감독 역시 지환과 비슷한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숨어있던 편집 필름을 발견하면서, ‘여판사’ 복원을 완성한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되찾는다.

“영화 말미에 지환이 필름을 찾잖아요. 완전히 사장될 수 있는 상황에서의 필름인데, 발견하게 돼죠. 그게 몇 분짜리건 의미가 있건 없건 간에 사라질 뻔한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뭉클함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여주인공이 담배 피우는 장면이었다고 잘린 거였잖아요. 없어질 뻔한 뭔가를 찾았을 때의 감격이 있더라고요. 그걸 통해서 지환도 잃어버린 자신의 삶을 되찾는 것 같았어요” 

주로 신스틸러나 주인공에 버금가는 조연으로 작품에 참여했다. 분량과 비중은 주인공만큼 컸지만, 이야기의 화자가 된 적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이야기를 풍성하게 넓혀주는 역할에 활용됐다. ‘오마주’에서는 이정은이 전체를 책임진다. 화자로서 이야기를 끈다.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한다. 

“전체를 책임지려면 에너지 안배를 잘 해야겠더라고요. 조연 같은 경우엔 주연이 가만히 있을 때 사건을 만들어주거나 극을 활기차게 만들어주는 역할이에요. 그럴 땐 힘을 줘도 좋죠. 그런데 주인공이 매번 힘을 주면 보기 불편하겠더라고요. 지환이 절망을 느끼는 상황이 꽤 있는데요. 그 감정을 분출하지는 않았어요. 감독님을 모델로 염두에 뒀을 때도, 내구성이 튼튼하고 밖으로는 표출하지 않거든요”

 

지환은 끊임없이 고민한다. 때론 “저도 이번 영화가 마지막일지도 모르죠”라고 내뱉는다. 현실이 되지 않길 바라지만, 어쩌면 현실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장치인 듯싶다. 꿈을 이루면 좋겠지만, 주위를 힘들게 하는 꿈이라면 포기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일테니까. 이정은 역시도 배우로서 힘들었던 순간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는 몰랐다. 

“제 주위에는 ‘연기 그만해’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엄마가 ‘너의 꿈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막지는 않겠다’고 한 적은 있지만요. 저는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누구도 지지해주지 않을 때 방법이 두 가지잖아요. 관두던가, 아니면 어차피 독고다이인데 가던가. 저는 후자였어요. 재밌으니까요. 제가 20대 때는 연기를 잘하지 못했거든요. 잘 안 되니까 오기가 생기고 더 재밌더라고요”

극 중 지환에게 있어 오마주는 홍은원 감독이 될 테다. 지환과 같은 고민을 하며 몇십 년은 먼저 험한 길을 헤쳐나간 인물이니 존경하고 따라하고 싶은 마음이 들 테다. 그렇다면 이정은에게 오마주가 있다면 누구일까. 지금은 하늘로 떠난 선배 배우 김영애를 꺼냈다. 

“드라마 찍고 있을 때 김영애 선배님이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계속해라’라고요. 영화에서도 ‘살아남으라’고 하잖아요. 제가 그 때 연기 공부를 더 해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러지 말고 계속 작품을 하라고 하셨어요. 비슷한 감동이었어요. 1등이 돼라가 아니라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아남으라고 하는 게 아직도 크게 와닿아요”

인터뷰②에 계속

사진=준필름

함상범 기자 intellybeas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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